부마민주항쟁 차지철 김재규~

lifestyle|2019. 10. 16. 07:45

부마민주항쟁 기념일 지정

부마민주항쟁 발생일을 정부는 올해부터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고 1016일 제40주년 부마 민주 항쟁 기념식을 최초의 정부 행사로 거행하기로 했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은 경남 지역(부산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발생한 대규모 민주화 운동입니다. 19791016일 부산에서 처음 발생하고 1018일 창원 지역까지 확산됐습니다.

부마민주항쟁~

 

부마민주항쟁의 의미

19791016일 박정희 18년 독재에 대항해서 부산대에서 시작된 저항은 부산의 도심에 확산되면서 18일에는 마산까지 이어져 유신독재 최초이자 최대의 시민 항쟁으로 번졌습니다. 서슬 퍼렇던 유신독재 시절에 부산과 마산 시민들은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18년의 박정희 군부 독재가 무너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의 10월 정신은 다음해 5월 광주에서 5.18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고 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은 더 극렬해졌습니다. 197910월 부산, 마산과 19805월 광주는 모두 박정희 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하나의 연속선상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19876월 전국적 규모로 계승된 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은 이 땅에서 박정희부터 이어진 군부 독재를 영원히 몰아냈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의 배경 

유신체제, 한계에 도달하다.

박정희 유신 체제는 1979년의 한계에 달했습니다.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연행, 체포,고문,연금 등의 탄압 속에서 재야세력과 야당의 저항이 거세졌습니다. 19798YH무역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 부당 폐업을 반대하고 농성을 벌이는 도중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22세의 여성 근로자가 숨지고 상당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197910월 초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유신 독재를 강력히 비판하고 이를 빌미로 박정희는 김영삼 총재를 의원직에서 제명하게 됩니다. 이 같은 일련의 사건으로 시민들은 박정희 유신독재와 공화당에 염증이 나면서 그 분노가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항쟁으로 번졌습니다.


 

부마지역의 경기침체

1970년대 말 수출 드라이브 중심의 한국 경제에는 제2차 오일 쇼크라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연계되어 심각한 위기에 빠졌습니다. 경기침체에 물가가 오르고 불황으로 서민의 삶은 더 팍팍해졌습다.


경제적 모순이 심하게 드러난 곳은 저임금 근로자를 바탕으로 한 수출지향적 경공업도시였던 부산과 마산이었습니다. 정부는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중소자본가, 도시 근로자와 농민 등에게 안정화 비용을 부과하게 됩니다. 이 같은 부가가치세의 추가적인 도입은 사회적 불만을 더욱 증폭시키는 방아쇠 역할을 하게 됩니다. .

 

 

부마민주항쟁 시간대별 사건

 

항쟁을 시작하다. 부산

 

19791016

부산대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이 몰려들어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데서 비롯됐습니다. 동아대 학생까지 가세하자 시위대는 부산 시내 중심지역까지 진입해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과 곳곳에서 충돌하게 됩니다. .

 

19791017

17일 시위에는 시민들까지 합세하기 시작했습니다. 야간시위에서 시위대 규모는 3~ 5만명에 달했습니다. 시위대에는 노동자, 화이트칼라, 상인, 종업원, 무직자, 반실업 상태의 자유 노동자, 고교생들도 함께 했습니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로 시민·학생들은 세무서, KBS 부산방송국, 도청, 파출소 등을 파괴했고 일부 경찰차와 언론사의 취재 차량도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것는 바로 정부의 독재, 언론의 소극적이고 독재정권 중심의 편파적 보도 태도, 부가세 도입에 대한 불만의 폭발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19791018

사태가 예사롭지 않게 확대되자 부마항쟁에 대해 박정희와 차지철은 강격책으로 치닫데 됩니다. 정부는 18일 새벽 0시를 기해서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마산으로 번진 항쟁


19791018

부산에서 촉발된 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번졌습니다. 1,000여명의 경남대 학생들이 마산 시내 중심가에 산발적으로 집결, 일부 시민들도 가세하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민·학생의 시위는 격화되어서 방송국, 공화당사, 파출소, 신문사에 돌을 투석하여 창유리를 파괴했습니다.

부마민주항쟁

 

19791019

19일에는 더욱 거세져서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됐습니다. 19일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산업 전문대학, 그리고 일부 고교생까지 가세하여 그 규모는 약 8,000명에 달했습니다.

 

19791020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2일 만인 1020일 정오를 기하여 정부는 마산과 창원 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했습니다. 이와 함께 마산지역 작전사령부는 마산 일대에 군을 진주시켜 공공건물에 대한 경계태세에 들어갑니다. 계엄령이 선포된 부산지역에는 공수부대(3공수)가 동원돼 시위를 벌이는 시민과 학생에 대해 강경하고 무자비한 진압이 이뤄졌습니다.




19791026

부마민주항쟁이 소강 상태인 상황에서 일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10.26 사건이 발발하면서 유신체제는 그 기나긴 막을 내리게 됩니다




차지철 이력

6대 국회의원 선거 때 민주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한 다음 1978년까지 4선의원을 지냈습니다. 박정희 경호실장에 임명된 후 월권행위로 대통령 비서실과 중앙정보부와 김재규 부장과의 마찰이 잦았습니다.


차지철은 19748월에 경호실장이 되었고, 야당문제에 대해 강경일변도로 대응했습니다. 19791016일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군 명령계통을 무시하고 공수단투입을 명령했습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19791026일 박정희와 같이 피격당해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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